원경왕후의 생애, 가계도와 최후
요즘 드라마 원경이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많았는데 원경왕후가 앞장서서 주인공이 된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원경왕후는 이방원의 조선확립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원경왕후 생애 |
원경왕후는 원래 고려말 명문가인 여흥민씨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여산 송씨의 4남 4녀 중 2녀로 1365년에 태어났습니다.
원경왕후의 집안은 대표적인 권문세족중 하나로 충정왕과 6촌지간이기도 했습니다.
1382년 우왕 8년 18세경에 당시 명성이 높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16세의 이방원과 혼인하였습니다.
혼인당시에는 금슬이 좋았고 첫 아이 정순공주를 출산하였습니다.

1392년 시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왕으로 즉위하면서 남편이 정안군으로 봉해지자 정녕옹주에 봉해졌습니다.
정녕옹주 시절 양녕, 효령, 충령 대군이 태어납니다.
이후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조선 2대 왕으로 즉위하고 이방원은 세자, 원경왕후는 세자빈으로 봉해졌습니다.
이방원이 태종으로 조선 3대왕으로 즉위한 뒤 왕비가 되었으나 이때부터 고난이 더욱 시작되었습니다.

태종이방원이 즉위한 후 태종은 외척에 의한 권세와 공신들의 영향력을 우려하여 민무구와 민무질을 유배보낸 뒤 장인 민제가 가문의 위기와 아들들의 유배로 병을 얻어 사망하자 사약을 내려 숙청하였습니다.
이후 아래 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역시 세자의 외숙으로 정사를 농단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유배보낸뒤 자진하라 명하여 숙청하였습니다.
또한 태종은 왕으로 즉위한 뒤 10명이 넘는 후궁을 들여 중전인 원경왕후와 다툼이 잦았습니다.


오빠들과 동생들의 사망, 후궁들로 인한 다툼등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가 나날이 나빠져 태종은 원경왕후를 폐비시키려 하였으나 상왕이자 형인 정종의 충고를 듣고 취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고려말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남성과 동등하여 혼자 재산을 상속받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왕이 아니고서는 중혼이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이성계 집안보다 고려 유력 정치가의 집안이었던 원경왕후 집안을 견제하기 위한 태종의 외척 몰살 행보가 원경왕후에게는 투기보다는 충격과 아픔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경왕후 가계도 |
후궁을 많이 들였음에도 원경왕후와 태종사이에는 아이들이 많았는데요.
첫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고 죽음을 맞을까봐 세종대왕이 된 셋째 아들인 충령대군에게 눈물로 목숨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원경왕후의 가계도를 보면 언니와 동생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래 위 남자 형제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자녀 중에서도 아들셋을 잃고 살아남은 양녕대군을 극진히 사랑하였으나 폐세자가 되어 힘들어 하였습니다.
이후 넷째 아들 성령대군뒤로도 아들을 하나 낳았으나 잃어 아들 넷을 잃은데다 성령대군까지 일찍 죽자 크게 상심하여 고기반찬을 끊으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원경왕후의 최후 |
원경왕후는 세종이 즉위하고 왕대비가 되었습니다.
왕의 어머니로 왕대비가 된 최초의 사례로 정종의 비와 더불어 남편이 상왕으로 살아있을때 대비가 된 얼마 안되는 사례입니다.
왕대비로 등극한지 2년뒤 창경궁에서 56세에 학질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절차의 간소화를 주장하며 세종에게 상복을 12일만 입으라고 권유했으나 세종은 다른건 몰라도 이는 따를 수 없다며 후덕대비(원경왕후)를 헌릉에 안장할때까지 쭉 상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외로워 보이는 어머니를 위해 사찰을 지으려 했으나 불교를 격렬히 반대하는 태종의 반대로 무산되고 세종4년 태종도 승하하자 헌릉에 함께 묻혀 현재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에 함께 쌍릉으로 묻혀 있습니다.
특히 조선왕릉중 쌍릉형태의 봉분 중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붙어 있는 능은 헌릉이 유일한 것으로 부모가 저승에서는 화해하여 화목하길 바란 세종대왕의 지극한 효심이 반영된 것이라 합니다.
티빙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원경에서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차주영 배우가 원경을 그려내고 있는데요.
앞으로의 행보도 많이 남아 있으니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여 시청하시면 더 재미있을 듯 합니다.